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금달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당시 가옥은 사라지고, 현재 주택 마당으로 쓰이고 있다. |
| 정의 | 의병항쟁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금달연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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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금달연(琴達淵, 1874~1914))은 경북 순흥 출신이며, 본관은 봉화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주에서 김낙임(金樂任)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부대의 중군장 김상태(金相泰)와 연합하여 순흥에 있는 일본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7년 음력 9월에 이르러 금달연은 이강년부대에 합류하였다. 영주·순흥·풍기·봉화·단양 등지에서 다른 지역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본군 헌병분경소와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08년에는 이강년부대의 종사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음력 9월 19일 이강년(李康秊)이 붙잡히자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선봉장이 되어, 영주·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14년 10월 21일 끝내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금달연 등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1909년 10월 29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83, 53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244-245쪽. 김일수 외,『영주독립운동사』, 영주시·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2006, 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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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순흥군 단산면 하단곡리 |
|---|---|
| 주소 | 경북 영주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금달연 등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단산면 단곡1리에 살고있는 최면수(83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금달연 등 판결문(대구지방재판소, 1909년 10월 29일)
금달연 집터 원경
금달연 집터 전경
금달연 집터 좌측
금달연 집터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