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장충단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기타(제단) |
| 상태 | 멸실 /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 현충시설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사한 장병들과 충신 열사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82 임오군란/1895 을미사변 |
|---|---|
| 관련 조직 | 시위대 |
| 관련 인물 | 명성황후/홍계훈(洪啓薰)/염도희(廉道希)/이경직(李耕稙)/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이경호(李璟鎬) |
| 관련 내용 |
장충단(奬忠壇)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해 갑오년 이후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00년 9월 고종황제의 명으로 전 어영청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쌓은 제단이다. 고종은 이곳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나,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면서 폐사되었다. 일제는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 벚꽃나무를 심고 위락시설을 설치했으며, 1932년에는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혼을 달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짓기까지 하였다. 대한제국시기 순국선열을 기리는 대표적 현충시설이었던 장충단의 유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비가 유일하다. 박문사는 해방 후 철거되었으며 장충단 사당과 부속건물은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충단비 역시 1969년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장충동2가 197번지 장충단공원 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황성신문』 1900년 10월 31일, 「광고-갑오 이후 전망 사졸을 치뢰할 사로 조칙을 봉유하여 전 남소영의 장충단을 설하고」. 「경성부시가강계도」(1914);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43쪽. 『고종시대사』 5, 1900년 10월 27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1, 216~217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문화유적편-』, 1987, 1134~11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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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중구 장충동2가 202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49 |
| 위치 고증 | 『황성신문』 1900년 10월 31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경성부시가강계도」(1914)에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장충단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














장충단 공원
장충단 터 - 현 신라호텔 영빈관(정면)
196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장충단비
장충단 터 - 현 신라호텔 영빈관(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