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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원 터 - 조병세 순국지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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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한말구국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인사동2길 가나아트스페이스 뒤편으로, 한정식집 등이 들어서 있다.
정의 1905년 12월 1일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가 순국 직전에 유소(遺疏)와 국민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순국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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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조병세(趙秉世)/조민희(趙民熙)/홍만식(洪萬植)/민영환(閔泳煥)/이상철(李相哲)/김봉학(金奉學)
관련 내용 조병세(趙秉世, 1827~1905)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해 11월 23일 고종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청하며 조약 파기를 주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조병세는 1905년 11월 26일 백관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을사늑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깊이 헤아려 조처할 것이니 경 등은 그리 알고 물러가기 바란다"는 황제의 비답이 내려졌지만, 조병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재차 백관들과 더불어 대한문 앞에 나아가 석고대죄하며 계속해서 조약 파기와 5적 처단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소두(疏頭)인 조병세를 연행해 정동헌병주재소에 구금하였다. 이튿날 석방된 조병세는 12월 1일 표훈원으로 가서 다시 상소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강제로 가마에 태워 조카인 조민희(趙民熙)의 집으로 끌고 가려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고종에게 드리는 유소(遺疏)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 및 각국 공사에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홍만식(洪萬植)·민영환(閔泳煥)에 이어 조병세까지 자결했다는 소식에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哲), 평양진위대 상등병 김봉학(金奉學) 등도 자결로써 그 뒤를 따랐다. 고종은 그에게 민영환과 마찬가지로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추증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경성부시가강계도」(1914)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42쪽.
『고종시대사』 4, 1899년 9월 23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0, 998쪽.
『동아일보』, 1924년 7월 4일, 「내동리 名物 : 寬勳洞 忠勳府」.
정교, 『대한계년사』 하, 국사편찬위원회, 1974,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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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성부 관훈동 118
주소 서울 종로구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경성부시가강계도」(1914)에 표훈원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고종시대사』 4권 1899년 9월 23일조에 표훈원(表勳院)을 전 충훈부(忠勳府)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동아일보』 1924년 7월 4일자 「내동리 명물 : 관훈동 충훈부」라는 기사에 '안동 네거리에서 사동으로 내려가자면 얼마 안가서 왼편에 허술한 대문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가 옛집 한 채가 있는데 이 집이 충훈부 또는 표훈원이라 부르는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곳은 독립협회의 대항단체로 1898년 7월 보부상을 동원해 조직한 황국협회의 사무소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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