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황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가옥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원형의 변형이 있으나 대들보 등 주요 구조는 건축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파리장서사건의 지도자 김황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사건)1927 제2차 유림단사건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곽종석(郭鍾錫)/김극영(金克永)/김창숙(金昌淑) |
| 관련 내용 |
김황(1896~1978)은 파리장서운동의 핵심인물 중 하나이다. 일명 우림(佑林)이라고 하며, 호는 중재(重齋)이다.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김극영과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의령에서 태어나 자랐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김극영은 세상을 등질 마음으로 가족을 이끌고 산청 황매산 서쪽 만암(상법리)이라는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곽종석의 문하에 있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산청·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된 제1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 구금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상해에 있던 김창숙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자, 이번에도 유림조직을 이용해 모금운동에 적극 나섰다가 제2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9개월의 옥고를 겪기도 했다. 그는 1928년에는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평지리)으로 이사해 강학을 시작했는데, 약 50년 동안 1,000여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 유림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말에 창씨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자신이 끝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고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음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제적원부」. 「단성군 신등면 상법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4. 「송영우 등 판결문」, 1927년 1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료관.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83~28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2, 1977, 312쪽. 오주환,『산청향토사』, 신우, 2005, 485~4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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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상법리 355 |
|---|---|
| 주소 | 경남 산청군 차황면 상법리 355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황매산로1062번길 28-6 |
| 위치 고증 | 김황의「제적원부」를 통해 평지리로 분가하기 전 상법리 355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송영우 등 판결문」의 상법리 373과 355 모두를「토지대장」에서 조회해 본 결과, 김황의 아버지 김극영의 명의로 된 것은 355번지임을 확인하였다. 「단성군 신등면 상법리 지적원도」와 현 지적도를 비교하여 위치를 비정하였다. |














김황 집터(「단성군 신등면 상법리 지적원도」, 1914)
김황
김황 집 입구
김황 집 전경
김황 집
김황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