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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왕재일 생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학생운동
종류 가옥
상태 변형 / 가옥이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과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정의 광주학생운동의 모체였던 성진회 총무 등으로 활동한 왕재일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9.11.3 광주학생운동
관련 조직 성진회/전남사회운동협의회/장흥농민조합 
관련 인물 최규창(崔圭昌)/장재성(張載性)/박인생(朴仁生)
관련 내용 왕재일(王在一, 1904~1961)은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호산(壺山)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최규창(崔圭昌)·장재성(張載性)·박인생(朴仁生)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았다. 성진회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날 때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모체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주학생운동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장흥지역 농민운동에 가담하였고, 1933년부터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6년에도 그는 장흥농민조합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37년 7월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1947년 『동광신문』 편집차장을 지냈고, 1952년 『호남절의사』를 편찬하였다. 1954년에는 『전라남도사』 편찬위원을, 1959년에는 『광주시보』를 편찬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왕재일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장재성 등 35인 판결문」, 1930년 10월 2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유재성 등 13인 판결문」, 1937년 7월 1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진동혁·이현희, 『항일투쟁가 왕재일의 생애와 사상』, 동현출판사, 1995, 19~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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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364
주소 전남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천변마을 364-1
도로명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천변길 116-68
위치 고증 「장재성 등 35인 판결문」 및 「유재성 등 13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향토사학자 문승이(86세,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거주) 씨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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