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지청천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일반 주택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대한민국임시정부/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복군/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 관련 인물 | 지청천(池靑天)/김구(金九)/홍진(洪震)/김원봉(金元鳳) |
| 관련 내용 |
지청천(1888~1957)은 서울 삼청동 출생으로, 본명은 석규(錫奎) 또는 대형(大亨)이다.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 1914년 일본 육사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으로 있다가 서로군정서의 병력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동, 이듬해 연해주에서 한인 무장세력이 연합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 자유시(현 스보보드니)로 이동해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여했다가 자유시참변 후 이르쿠츠크로 가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만주로 돌아와 이듬해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5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혁신의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홍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군사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 관내로 이동,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35년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가 1937년 탈퇴해 조선혁명당을 재조직하고, 김구와 함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환국하여 1947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지청천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당일 무장 독립 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 문학과지성사, 1995, 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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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삼청동 30 |
|---|---|
| 주소 | 서울 종로구 삼청동 3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국가보훈처「지청천 공적조서」와 지청천 장군의 딸인 지복영의 회고록에 해당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다. |














지청천
지청천 생가 터
표지석(확대)
생가 터 옆 어린왕자 카페 앞 인도에 설치된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