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창덕궁 금호문 앞 송학선 의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부분변형 / 현재 창덕궁휴게소와 매표소가 일대에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6년 4월 28일 순종황제 국상 조문차 창덕궁을 찾은 사이토[齊藤] 총독을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 의거의 현장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6 사이토주살 의거(송학선 의거)/1926 6·10만세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안중근(安重根) |
| 관련 내용 |
송학선(宋學先, 1897∼1927)은 서울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뒤로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다 그만두었는데,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주살한 안중근을 흠모하던 송학선은 이 기회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처단할 마음을 먹었다. 망곡 대열에 참여한 송학선은 4월 27일 가슴에 비수[洋食刀]를 품고 빈소의 출입구인 창덕궁 서남쪽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나아가 부근을 배회하며 사이토 총독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다. 다음날인 28일에도 창덕궁 금호문 앞으로 나가 서성이는데 오후 1시 10분경 경성부협의원 등 일본인 세 명을 태운 자동차 한 대가 금호문 안에서 나왔다. 주변에서 저 차안에 사이토 총독이 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송학선은 그들을 사이토 총독 일행으로 오인하고 자동차에 뛰어 올라 타고 있던 일본인 한 명을 칼로 찔러 즉사시키고 다른 한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재동 방면으로 도주하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앞 골목에서 순사들과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송학선의 의거는 뒤이은 6·10만세운동의 전주곡이 되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송학선은 1926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순국하였다. |
| 참고 문헌 |
「송학선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6년 5월 2일, 「金虎門前 事件, 昨日 午後 一時 解禁, 단도휴대하고 자동차로 습격」. 一記者, 「國葬前後에 드러난 事件들」, 『개벽』71, 1926, 75∼76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4, 서울특별시, 1981, 100∼1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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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와룡동 4 |
|---|---|
| 주소 | 서울 종로구 와룡동 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26년 5월 2일자와『개벽』 71호 기사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창덕궁 금호문 앞 송학선 의거지
송학선 의거 당시 금호문
창덕궁 앞 율곡로 변에 설치된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