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대한제국군 전투지 - 서울시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완전변형 |
| 정의 |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과정에서 군인들의 무장봉기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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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군대해산식 당일 군인들의 무장봉기는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월 1일 오전 8시경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무장해제된 상태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 할 즈음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격분한 장병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숭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 병력과 제1·2대대의 응원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한국군은 결국 10시 50분경 남대문 병영을 점령당한 데 이어 11시 40분경 서소문 병영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병영에서 퇴각한 한국군의 일부는 서소문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 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의 기초를 놓았다. |
| 참고 문헌 |
경부철도주식회사, 「한국경성전도」, 1903. 「과거 한말 병사들의 병영생활 내막기」(『野談』1938. 7), (「出版物 禁止 要項 - 安寧禁止(出版法에 의한 것)」, 1938. 5. 2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내외항일문서.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3, 1979, 192-196쪽. 성대경, 「韓末의 軍隊解散과 그 蜂起」, 『成大史林』1, 1965, 55-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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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 45, 서울상공회의소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한국경성전도」(1903)에 서소문안 남동쪽으로 시위제1대대 병영(현 서소문동 120)이, 숭례문안 동남쪽으로 친위제2대대 병영(현 남창동 34)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두 병영을 중심으로 한 서소문 - 숭례문 일대가 군대해산 당시 시가전이 벌어졌다. |














시위보병 1연대 1대대 장병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나오던 길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병영 터(부영빌딩) 앞에 설치된 표지석
시위대와 장병들이 일본 조선주차군과 시가전을 벌였던 숭례문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