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산일본공사관 - 통감관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일제통치, 일제수탈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 정의 |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왕비 시해를 모의한 곳이자, 1910년 한국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이 ‘합병조약’을 맺은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95 을미사변/1910 ‘한일합병조약’ 체결장소 |
|---|---|
| 관련 조직 | 총독부/통감부/일본공사관 |
| 관련 인물 | 이완용(李完用) |
| 관련 내용 |
일본공사관이 처음 설치된 것은 1880년 11월 하나[花房義質]부사가 주차변리공사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와 상주공관을 요청하면서부터였다. 이 때 조선정부에서 제공한 장소가 서대문밖 천연정(현 금화초교) 자리였는데 1882년 임오군란 과정에서 불에 타고, 그 뒤 교동(지금의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교동 공사관 또한 1884년 갑신정변 와중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자리잡은 곳이 남산 북쪽기슭 지금의 예장동 2번지 일대였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제4조에 의거해 이 일대를 공사관 부지로 얻고 건물의 공사비까지 조선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경 새 공사관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1895년 9월 일본공사로 부임한 미우라[三浦梧樓]가 명성황후 시해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바로 그 건물이었다. 남산 일본공사관은 을사늑약으로 1906년 2월 한국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07년 1월 통감부가 남산 왜성대 신축 청사(현 중구 예장동 8번지)로 이전하면서 통감관저로 바뀌었다. 이 곳에서 제2대 한국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1910년 8월 총리대신 이완용과 ‘합병조약’을 체결한 뒤, 총독관저로 사용되다가, 1940년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으로 바뀌었다. |
| 참고 문헌 |
「경성시가전도」(191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32~33쪽. 『고종시대사』6, 1907년 1월 25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2, 5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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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남산정 |
|---|---|
| 주소 | 서울 중구 예장동 2-1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 |
| 위치 고증 | 「경성시가전도」(1910)에 총독관저로 바뀐 남산 북쪽 기슭 통감관저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














남산 일본공사관.통감 관저 터
남산 일본공사관.통감 관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