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여운형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주의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현재 생가는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되었고, 아래쪽에는 기념관을 건립하여 운영되고 있다. |
| 정의 |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동맹 등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이 태어나 1908년까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여운형(呂運亨) |
| 관련 내용 |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출생하여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본과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30년에 징역 3년의 판결을 받고 1932년까지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해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해방 후 1947년 7월 19일 권총 피격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생가는 여운형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생가는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지만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
| 참고 문헌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
|---|---|
|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여운형 공적조서」에서 여운형 생가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가 세운 몽양여운형 생가지 비석이 있어 이곳이 생가 터임을 말해준다. 또한 양평군청 문화유산팀장으로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하였던 이강웅(현 교육혁신팀장)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미군정 고문관으로 입국한 서재필을 맞이한 여운형(우), 김규식(좌)(1940)
대전형무소를 가출옥한 안창호를 맞이한 여운형(좌)과 조만식(우)(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