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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익현 생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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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생가는 멸실되었고, 그 자리에 최익현숭모사업회에서 설치한 기념비석이 서 있다.
정의 한말 상소투쟁과 의병항쟁에 참여한 최익현이 태어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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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최익현(崔益鉉)
관련 내용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으로 포천현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 출사한 그는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신창현감을 역임하고, 1868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공격하는 사직소를 올리고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873년(고종 10) 동부승지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대원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이른바 계유상소를 올리고 다시 사직하였다. 결국, 이 상소는 대원군의 10년 집정을 종식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하여 한·일 간 수교를 반대하였다. 이후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또한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무렵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와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 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05년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순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되어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368~38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의열투쟁사, 1971, 155~16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8-문화투쟁사, 1971, 908~913쪽.
포천군지편찬위원회, 『포천군지』 상, 1997, 353쪽.
박민영, 『대한 선비의 표상 최익현』, 독립기념관, 2012.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최익현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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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이가채리
주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면암길 66-5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최익현 공적조서」에 관련 사실이 명기되어 있으며, '면암최익현서너생생가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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