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대전형무소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일제통치, 일제수탈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대전교도소로 이용되었으나 1984년 이전과 함께 도시재개발로 현재는 망루와 사용했던 우물터만이 남아 있다. |
| 정의 | 안창호·여운형·김창숙 등이 투옥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대전지역 대표적인 탄압기구인 대전형무소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김창숙(金昌淑) |
| 관련 내용 |
일제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계속되면서 독립투사들을 수감하기 위한 시설이 부족하게 되자 1919년 5월 대전감옥을 신축하였다. 대전감옥은 독립운동가들을 전담·수용하기 위해 감옥안에 또 다른 감옥을 만들고, 이중벽을 설치하여 탈옥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대전감옥은 1919년 9월 신축을 완료하고 개소했으며 1923년 명칭을 대전형무소로 변경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투사들을 수감하였다. 대전형무소는 안창호·여운형·김창숙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안창호는 1932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2년 6개월을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32년 2월 석방되었다. 여운형도 1932년 체포되어 3년간의 투옥기간 중 대부분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김창숙은 1935년 체포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해방 때까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大田一萬分一朝鮮地形圖』, 1928. 『동아일보』, 1929년 9월 3일,「儒林團事件의 巨頭 金昌淑또 移監, 작이일에 호송 하얏다고, 大邱監獄에서 太田에」. 『동아일보』, 1933년 4월 11일,「安昌浩最近消息. 대전감옥에서 친지에 편지」. 『동아일보』, 1935년 2월 11일,「島山 安昌浩 出獄 上海에서 잡혀 三年間 獄生活, 今日 大田發 京城一泊」. 『동아일보』, 1930년 9월 25일,「呂運亨 移監, 大田刑務所로」. 대전광역시,『 대전100년사』2, 2002, 1477~147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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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중촌정 |
|---|---|
|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 16-1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총독부 발행 대전지도(1928, 1:10,000)에 대전형무소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 망루를 비롯해 당시 모습 일부가 남아 있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














여운형 대전형무소 이감기사(『동아일보』, 1930년 9월 25일)
대전형무소를 가출옥한 안창호와 그를 맞이한 여운형, 조만식(1935년)
대전형무소가 표기된 대전지도(1928년)
김창숙 대전형무소 이감기사(『동아일보』, 1929년 9월 3일)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하는 안창호와 그를 맞은 여운형(1935년 2월 10일)
옛 대전형무소 터에 남아있는 우물
대전형무소(1932년)
옛 대전형무소 터에 남아있는 망루
옛 대전형무소 터 - 현 자유회관 전경
옛 대전형무소 터
옛 대전형무소 터
안창호 대전형무소 수감기사(『동아일보』, 1933년 4월 11일)
안창호 대전형무소 출옥기사(『동아일보』, 1935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