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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재필 본가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서재필 본가는 헐리고 원래의 위치에 새 집이 세워져 있다.
정의 독립협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서재필의 본가가 있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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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독립협회/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회 
관련 인물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관련 내용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외가인 전라남도 동복군 문전면 가천리(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부친 서광효(徐光孝)와 성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군 구자곡면)이며, 7살 때 충청남도 대덕군(현 대전시)에 살던 7촌숙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서광하의 부인은 도승지를 역임한 김성근(金聲根) 동생이다. 서재필은 입양된 후 김성근의 집으로 보내졌다.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서 김옥균(金玉均)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3년 4월에 일본의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유학하여 이듬해 7월에 귀국한 후 김옥균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병조참판을 맡았으나,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885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암스트롱(Muriel.Mary.Armstrong)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하였다.

1895년 12월 박영효(朴泳孝)의 권유로 귀국,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7월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였으나 1898년 5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산하에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등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7년 6월 귀국하여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였다. 서재필은 이때 본가 방문을 계획하였으며, 마을에서는 환영행사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 출마계획이 여의치 않자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1월 5일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병편」, 『달성서씨세보』 2.
「서재필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48~49쪽.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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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주소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김도태가 쓴 『서재필박사자서전』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서재필의 족보에 의하면, 부모와 형의 묘가 구자곡면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서재필 본가 터에 살고 있는 김병락(1911년생)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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