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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지섭 생가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집은 없어졌고, 그 터에는 새 주택이 들어서 있다.
정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일본 왕궁 앞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는 등 의열투쟁을 전개한 김지섭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4.1.5 일본 황궁 앞 이중교폭탄투척사건(김지섭의거)
관련 조직 의열단 
관련 인물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관련 내용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호는 추강(秋岡)이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1923년 3월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과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상하이[上海]에서 폭탄 36개를 들여왔다. 그러나 이 거사는 실행 직전에 단원 13명이 검거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김지섭은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김지섭은 1923년 9월 일본이 도쿄[東京] 대지진을 빌미로 한인들을 학살하자 투쟁 목표를 일본 제국의회로 정하였다. 그는 의열단 기밀부가 준 폭탄 3개를 품고 화물선에 숨어 도쿄로 향했다. 그런데 제국의회는 휴회 중이었다. 이에 김지섭은 목표를 일본 왕궁으로 변경하였다.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20분쯤 왕궁으로 들어가는 이중교(二重橋) 앞에 이르러 김지섭은 세 발의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폭탄은 모두 터지지 않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김지섭은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언도하라'는 법정투쟁을 벌였다. 자신이 일제의 입장에서는 대역 죄인이지만 한국인으로서 무죄라는 것이다. 결국 김지섭은 1925년 1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20일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중교 의거로 불리는 이 거사는 일본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첫 투쟁이었으며 식민지 해방투쟁사에서 빛나는 의열투쟁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김지섭 이력서」, 1915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김지섭 예심종결결정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의열단폭탄사건 검거에 관한 건」, 1923년 3월 31일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 「이중교 폭탄 범인은 의열단원 김지섭, 구월 일일 진재 때 조선인 학살이 도화선으로, 일본 상하를 경악케한 대사건 발표」.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338-34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143~152·281~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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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369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미동길 126-4
위치 고증 「김지섭 예심종결결정서」 및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김지섭 이력서」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위치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김창현과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의거하여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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