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경복궁 옥호루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부분변형(복원) / 2007년 10월 3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 |
| 정의 |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당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95.10.8 을미사변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명성황후(明成皇后)/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홍계훈(洪啓薰)/이경직(李耕稙) |
| 관련 내용 |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은 1895년(고종 32)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앞서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고 획책했으나, 뒤이은 삼국간섭으로 궁지에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왕실은 친러배일 정책을 추진해 일본을 고립시켜 나갔다. 이에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후임으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를 일본공사에 임명하여 정국의 반전을 꾀했다. 1895년 9월 1일 부임한 미우라 일본공사는 조선정부 친러정책의 진원지로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일본 세력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공사관 서기 등과 함께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축으로 낭인배 등을 동원하는 한편, 명성황후의 정적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회유 협박하고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 등 훈련대 대대장들을 끌어들여 10월 8일 새벽 행동에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에 난입한 폭도들은 시위대와 교전을 벌여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사살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으로 몰려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한 뒤, 곤녕합 옥호루에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는 야만적 행동까지 저질렀다. 비극의 역사현장인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양반가옥을 응용해 건립한 250칸 규모의 건물로, 사랑채인 장안당, 안채인 곤녕합과 그밖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물산공진회를 개최할 때 철거되었다가, 2007년 10월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
| 참고 문헌 |
『고종시대사』 3, 1895년 8월 20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69, 988쪽. 『동아일보』, 1930년 1월 29일, 「風雨卄年 韓末政客의 回顧談(三) : 紅血묻은 玉壺樓」. 文一平, 「舊宮哀詞 - 景福宮」, 『삼천리』 3권 10호, 1931년 10월, 33~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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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
| 위치 고증 | 『삼천리』 제3권 제10호의 「구궁애사 - 경복궁」이라는 기사에 '(경복궁)광화문을 들어가 근정전을 지나서 강녕전, 교태전을 돌아가면 건청궁(乾淸宮)이 있었으며, 그 중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의비참하게 죽으신 곳'이라고, 폐허로 변한 건청궁 옥호루를 묘사한 문일평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














복원된 경복궁 옥호루
경복궁 옥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