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성수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당시의 가옥은 없어지고 다른 가옥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밀양군 부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 등을 전개한 김성수가 태어나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의열단/황포군관학교/남화한인청년연맹/한족총연합회 |
| 관련 인물 | 백정기/김규희/정화암/유자명/정해리/유여주/오면식/이달/엄순봉/이규호/원심창/이강훈/김좌진(金佐鎭)/백정기(白貞基) |
| 관련 내용 |
김성수(金聖壽, 1900∼1969)는 춘화교회를 세운 김응삼(金應三)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밀양군 부북면 춘화리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4월 6일 밀양군 부북면 춘화리·청운리·덕곡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하였고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8년 상하이[上海]에서 백정기·김규희·정화암·유자명·정해리·유여주·오면식·이달·엄순봉·이규호·원심창·이강훈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30년에는 김좌진 등과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제가 상해를 침공했을 때 제19로군에 입대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1933년 백정기 등과 논의하여 주중일본공사 아라요시[有吉明]를 폭살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친일분자의 숙청작업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38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37년 8월 14일, 「金聖壽 送局」. 『동아일보』, 1938년 7월 17일, 「上海서 온 金聖壽, 十八年 言渡」.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71, 227∼22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825∼83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4, 1978, 906쪽. 춘화김씨가족회, 『춘화(춘화김씨가족복음화 110주년 기념집)』, 춘화김씨가족회, 2007, 43∼45쪽.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8, 543∼5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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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춘화리 255 |
|---|---|
| 주소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 25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3권과 『동아일보』1937년 8월 14일자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인 김응삼의「제적등본」에 밀양군 부북면 춘화리 255번지로 되어 있어 이를「밀양군 부북면 춘화리 지적원도」와 현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이일순)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원순과 김성수
김성수 생가 터 원경
김성수
김성수 생가 터 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