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수봉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생가는 없어지고,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
| 정의 | 의열단원으로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주도했던 최수봉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12.27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
|---|---|
| 관련 조직 | 의열단 |
| 관련 인물 | 김상윤(金相潤)/김원석(金元錫)/장봉석(張鳳錫) |
| 관련 내용 |
최수봉(崔壽鳳, 일명 崔敬鶴, 1894~1921)은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가 되던 해에 동화학교(同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표(全鴻杓) 밑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12년 동래 범어사의 불교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던 중 학교가 폐교당하자 중퇴하였다. 남만주로 건너가 펑톈[奉天]·안둥[安東] 등지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때를 기다렸다.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서 김상윤(金相潤)과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조선독립을 결의하였다. 이후 김상윤의 소개로 만난 대구의 김원석(金元錫)과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고 경찰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의거를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920년 12월 27일을 의거날로 정하고 26일 저녁 밀양면 삼문리 장봉석(張鳳錫) 소유의 농막에서 김원석으로부터 폭탄 2개를 건네 받았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渡邊末次郞]가 경찰서원 19명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 때 폭탄 2개를 투척하였다. 그러나 첫번째 폭탄은 불발이 되고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으나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이에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1921년 2월 1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담당검사의 공소로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상고하였으나,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같은 해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최경학 판결문」, 1921년 4월 16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최경학 판결문」, 1921년 5월 23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304쪽.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38~239쪽.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31~32쪽.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 51~5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205~207·655~660쪽. 강만길 편, 『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162~164쪽. 김영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6)의열투쟁 Ⅰ - 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53~15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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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
|---|---|
| 주소 | 경남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79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최경학 판결문」 및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최경학 판결문」에 기록된 주소지를 지적원도와 현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최수봉 집터 우측
최수봉 집터 전면
최수봉 집터 좌측
최수봉 집터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