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황상규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멸실되어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 정의 | 김원봉의 고모부로 대한광복단·북로군정서 및 의열단에 가담하였으며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과 신간회 밀양지회 지회장 등을 역임한 황상규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풍기광복단/대한광복회/대한독립의군부/조선독립군정사/의열단/밀양청년회/신간회 밀양지회/밀양협동조합/신간회 |
| 관련 인물 | 황상규(黃尙奎)/조소앙(趙素昻)/김좌진(金佐鎭)/김원봉(金元鳳) |
| 관련 내용 |
황상규(1890~1930)는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원봉의 고모부로 집성학교를 졸업한뒤 마산의 창신학교와 밀양의 고명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동화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1913년 풍기광복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 조소앙,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고 재무총책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1918년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 중 한사람이다. 1919년 4월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선독립군정사로 명칭을 바꾸며 조직을 확대하자 역시 회계과장으로 재정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11월 김원봉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에 필요한 무기를 조달하였다. 서울에 잠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던 1920년 6월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6월 징역 7년을 언도 받고 복역한 후 1926년 4월 출옥했다. 1927년 10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 12월 신간회 밀양지회 지회장, 1928년 3월 밀양협동조합위원, 1929년 7월 신간회 본부 서기장겸 서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31년 9월 작고한 뒤 그의 장례식은 수만명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 1921년 6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9년 7월 6일,「新幹懇談會部署全部決定, 각부 부장도 전부 결뎡돼, 書記長은 黃尙奎氏」. 『동아일보』, 1931년 9월 9일,「萬餘名會 集黃尙奎氏 安葬」. 박태원,『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 26~3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91~94·660~673쪽. 김영범,『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 비평사, 1997.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124·133~140·154~160·217·397~447쪽. 김영범,『(한국독립운동의 역사26)의열투쟁 Ⅰ-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31~132·136~141·147~151쪽. 김승,「한말 일제하 밀양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지역과 역사』15, 부경역사연구소,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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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 957 |
|---|---|
| 주소 | 경남 밀양시 내이동 957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노상하4길 43-1 |
| 위치 고증 |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와 현 지적도를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황상규
황상규 집터 원경
황상규 집터 전면
우측 도로에서 본 황상규 집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