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노응규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건물들은 모두 멸실되었다. |
| 정의 | 진주의병 의병장 노응규가 거주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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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노응규(盧應奎, 1861~1907)의 호는 신암(愼菴)이며, 경남 거창 혹은 안의에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안의에 살았다. 허전(許傳)·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대개의 한말 유생들이 그러하듯 위정척사계열의 사상을 견지하게 되었다. 노응규는 1896년 2월 19일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안의에서 거의하여 진주성을 장악하였다. 이후 노응규의 진주의병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하기 위해 김해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결국 4월 24일 관군에게 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 안의에서는 그의 동지들과 가족들이 피살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이 후 고종에게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져 규장각 주사, 중추원 의관 등의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으나, 이 역시도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재차 거의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최익현, 노종룡(盧鍾龍) 등과의 거병이 실패한 후, 1906년 11월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노력이 되었다.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노응규는 한성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1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1907년 2월 16일 병사하였다. 현재 노응규의 집터는 멸실되어 원형과 조성과정을 전혀 알 수 없으며, 집터 추정지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이격된 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조성하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
| 참고 문헌 |
박영석,『주한일본공사관기록』8, 국사편찬위원회, 1993, 236·24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240-24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184-206쪽. 홍순권,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 『지역사회연구』5, 한국지역사회학회, 1997, 96-99쪽. 김준형,「노응규의 의병활동과 사상적 특성」,『남명학연구』24, 2007, 337-347쪽. 김성진·추경화,『함양항일투사록』, 함양문화원, 2007, 14-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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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안의군 현내면 당본리 죽전 |
|---|---|
| 주소 | 경남 함양군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노응규의 상소문을 통해 의병봉기 당시 안의군에 노응규가 거주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노응규의병장 안의의병거사 추모사업위원회 하영복(74) 위원장과 김경두 현 안의면장이 집터의 위치를 고증하였다. |














최익현에게 보낸 노응규 서한
의병대장 신암 노응규선생 순국사적비
노응규 집터 원경
노응규 집터 뒷산에서 바라본 당본리
노응규 집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