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문태수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멸실되어 기념사업으로 복원 중이다. |
| 정의 |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문태수가 태어나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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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문태수(文泰洙, 1880~1913)의 본관은 창원이며, 본명은 태현(泰鉉)이고, 태서(泰西)·태서(泰瑞)라고도 한다. 1904년 금강산에서 병서를 배웠으며,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팔공산으로 이동한 뒤 장수읍 함락, 무주 부남면 습격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삼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1907년 12월 각도 의병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고 할 때 호남군 100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13도연합 의병부대 중 호남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총대장인 대한관동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부친상 때문에 귀향하면서 서울진격계획이 좌절되자 무주로 돌아 왔다. 1908년 2월 무주주재소를 습격하다가 붙잡혔으나 탈출했다. 4월 신명선(申明善) 부대와 장수읍을 습격한 뒤 학교와 군청 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 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 습격, 5월 남원 이문성 동북방 전투, 10월 경부선 이원역 습격·방화 등 활동을 계속했다. 11월 이후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하여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0년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재기를 꾀하던 중 1911년 8월 붙잡혔다. 대구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옥중에서 자결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김성진,『문태서연구』, 함양문화원, 1999, 22-25쪽. 박민영, 「덕유산의 호랑이 문태수 의병장(1880~1913.2.4.)」, 『순국』205, 2008. 김성진·추경화,『함양항일투사록』, 함양문화원, 2007, 45-9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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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안의군 서상면 장구지동 |
|---|---|
| 주소 |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94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폭도에 관한 편책』등의 사료들을 통해 문태수의 활동상을 파악할 수 있다. 문태수의 집터와 관련해서는 함양문화원 편찬의『문태서연구』와 함양군의「문태수 의병장 생가복원 성역화 사업」계획서를 참고하였다. |














문태수 행장
문태수 집터 - 의병대장 문공 태서 태지비
문태수 집터 원경
문태수 의병장 생가터 표지석
문태수 집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