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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민영환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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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한말구국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현재 조계사 경내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앞마당(우정국 시민공원 서편)으로 바뀌어 있다.
정의 1905년 11월 30일 시종무관장 육군부장 민영환이 일본의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 순국할 당시 살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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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을사늑약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조병세(趙秉世)
관련 내용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선혜청 당상을 지낸 민겸호의 아들로, 1878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민씨 세도에 힘입어 도승지·예조참판·형조참판·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과 1897년 영국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파견되어 서구 여러 나라들을 시찰한 뒤, 개화·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립협회 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1898년 이후 의정부 참정대신·원수부 회계국 총장·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을 받아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조병세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명(連名)으로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조병세가 구금된 뒤 자신이 소두가 되어 재차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11월 30일 새벽 전동 이완식의 집(현 공평빌딩 앞)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순절후 충정공(忠正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중앙일보』, 1932년 12월 11일, 「건물로맨스, 집터를 찾아서(1); 안동김씨의 세도도 회고하면 일장의 춘몽, 典洞 민충정공의 舊基」.
『동아일보』, 1959년 11월 30일, 「烈士의 後裔들(九) 閔泳煥公의 三男 光植氏」.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61~63쪽.
이경재, 『서울정도육백년』 4, 1993, 338~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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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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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소
주소 서울 종로구 견지동 27-2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중앙일보』 1932년 12월 11일자에 ‘전동(견지동) 마루턱 올라서 서쪽으로 들여다보면 대문은 큼직하지만 줄행랑이 반쯤 넘어 허물어진 집이 을사년에 자결한 민충정공의 옛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아일보』 1959년 11월 30일자에 ‘선친의 자결 당시 태고사(현 조계사) 뒤편에 1천여 평의 대지를 가진 집이 있었다’는 민영환의 3남 광식씨의 회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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