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상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헌법재판소 북쪽 지하주차장 입구로 변했으며, 주변 화단 은행나무까지가 당시 집터로 추정된다. |
| 정의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조선일보사 사장, 신간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한 이상재가 1922년 말부터 1927년 3월 사망할 때까지 거주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독립협회/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조선교육협회/신간회 |
| 관련 인물 | 최린(崔麟) |
| 관련 내용 |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독립협회의 부회장을 역임한 민족운동의 원로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인 1913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에 취임하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를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키워나갔다. 이어 3·1운동으로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조선교육협회 초대회장에 선출되어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이끌었고,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조선일보』를 민족운동의 대변지로 변화시켰다. 1927년 2월 절대독립 노선에 입각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출범할 때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노환으로 1927년 3월 29일 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신간회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100여 개 사회단체가 주도하여 초유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군중이 운집하여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간회 초대회장 이상재가 숨을 거둔 재동 68번지의 집은 3·1운동의 총 주도자 최린(崔麟)이 살던 집이기도 하다. 「경성부지적목록」에 재동 68번지 대지 59평 땅의 소유주가 1917년도에는 정창석으로, 1927년도에는 성낙순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셋집살이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상재의 경우 서울에서 셋집살이를 전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
| 참고 문헌 |
「이상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일보』, 1927년 3월 31일, 「이상재 선생 별세, 29일 야(夜) 재동 자택에서」. 『청년』 2권 11호, 1922년 12월, 60쪽, 「會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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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재동 68 |
|---|---|
| 주소 | 서울 종로구 재동 83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15 |
| 위치 고증 | 『청년』 제2권 제11호 「회황」이라는 기사의 '본회 고문 총무 이상재씨는 재동 68번지로 전거(轉居)'라는 내용과 『조선일보』 1927년 3월 31일자 기사의 '이상재 선생이 1927년 3월 29일 밤 재동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내용을 통해 당시의 거주지가 경성부 재동 68번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상재
이상재 집터 - 현 헌법재판소 지하 주차장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