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한산성연합의진 전투지 - 남한산성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현재 국가사적 57호로서 수어장대(경기도유형문화재 1호), 숭열전(2호),청량관(3호), 연무당(6호) 등 주요 지방 문화재가 잘 보전되어 있다. 남한산성연합의진 관련 사적으로서 남문, 북문 등의 시설물을 찾아 볼 수 있다. |
| 정의 | 1896년 2월부터 3월까지 남한산성연합의병이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광주의병/이천의병/양근의병 |
| 관련 인물 | 심진원(沈鎭元)/박주영(朴周英)/이석용(李錫容) |
| 관련 내용 |
남한산성연합의병은 1896년 2월경 남한산성에서 광주·이천·양근지역의 3개 의병이 연합한 부대이다. 심진원(沈鎭元)이 이끄는 광주의병이 가장 먼저 남한산성에 입성했으며, 그 뒤를 이어 박주영(朴周英)이 이끄는 이천의병이 합류하였다. 또 여기에 이석용(李錫容)이 이끄는 양근의병이 합세하면서 남한산성연합의병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남한산성은 천연의 요새였으며, 당시 군수물자도 비교적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남한산성연합의병은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과 그의 사주(使嗾)를 받은 관군의 공격에 맞써 싸웠다. 첫 전투는 1896년 3월 5일경에 벌어졌다. 일제는 한국군 500여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연합의병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첫 전투를 쉽게 승리하였다. 이어 2~3일 산발적인 접촉이 있었으나 모두 연합의병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남한산성으로 몰려드는 의병이 날로 증가하였다. 전투력이 증강됨에 따라 남한산성연합의병은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같은 해 3월 22일 남한산성이 관군에게 함락되면서 무산되었다. 관군이 이날 새벽 2시경 남한산성을 공격해왔다. 남한산성연합의병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관군의 이간책으로 의진의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해 남한산성연합의병은 관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
| 참고 문헌 |
김하락, 「진중일기」, 『독립운동사자료집』1 - 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91쪽. 김태원,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 『한말의병자료집』- 독립운동사자료총서 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15쪽. 광주군지편찬위원회, 『광주군지』, 광주군, 1990, 346-353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 1995, 26-27쪽.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16-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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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
|---|---|
| 주소 | 경기도 광주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진중일기」·《동경조일신문》 등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현재 위치는 남한산성이 현존하므로 이에 따라 확정하였다.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진중일기」·《동경조일신문》 등의 자료에 광주·이천·양근지역의 3개 의병이 남한산성에서 연합의병을 결성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