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안재홍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강북삼성병원에 편입되어 있다. |
| 정의 |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단체인 신간회 결성 당시 안재홍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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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대한민국청년외교단/신간회/흥업구락부/조선어학회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안재홍(安在鴻, 1891~1965)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학부를 마치고,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과 1917년 중앙YMCA 교육부 간사를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 시대일보 논설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해 조선일보 주필과 부사장, 사장을 거쳤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2월 신간회 총무간사회 간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우파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1928년 이후 조선일보필화사건, 신간회 민중대회사건,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등에 연루되어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모두 9차례에 걸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국민당을 창당해 중간파 지도자로 활약하며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1950년 5월 고향인 평택에서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신간회 임원명단]」,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2)』, 192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군관학교 입교주선자사건 경찰신문조서)안재홍 신문조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5, 2001, 16~1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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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평동 75-17 |
|---|---|
| 주소 | 서울 종로구 평동 7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2)』에 수록된 「[신간회 임원명단]」에 신간회 결성 당시 안재홍의 주소지가 경성부 평동 75번지 17호로 기록되어 있다. |














안재홍 집터 - 현 강북성심병원 뒷편
안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