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문일평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희명빌딩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간회운동 당시 살던 집터(수창동 111)는 현재 경희궁의아침 3단지에 편입되어 있다. |
| 정의 | 1939년 타계할 당시 문일평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1927 신간회운동 |
|---|---|
| 관련 조직 | 신간회(新幹會)/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동제사(同濟社) |
| 관련 인물 | 문일평(文一平)/신채호(申采浩)/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 |
| 관련 내용 | 문일평(1888~1939)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08년 귀국해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학교, 의주 양실학교, 서울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정경학부에 진학해 한 학기를 수강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그는 신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 등과 교유하면서 박달학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 3·1운동에 가담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나온 뒤 중동학교·중앙고보·송도고보·배재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역사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1925년에 다시 1년 가까이 일본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1927년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에 발기인과 간사로 참여하였다. 1933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39년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일하면서 조선심(朝鮮心)으로 표현되는, 우리 역사 속에 담겨있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찾아 널리 보급하려 애썼다. 그의 연구물 대부분이 이때『조선일보』지상에 발표되어 사후『호암전집』3책(1939)으로 집대성되었다. 그의 역사연구는「사상(史上)의 기인(奇人)」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온 기인이나 반역자들을 통해 그 시대상과 민중의 저항을 찾으려 하였다. 또한 문일평은 이미 알려진 역사 사실을 새롭게 정리하고 재해석해 민중에게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한편 그는‘조선학운동’에 참여하여 국학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신간회 임원 명단」,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2)』, 1927 ; 국사편찬위원회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국내외항일운동문서. 『동아일보』1939년 4월 5일자,「湖巖 文一平氏 作三日 別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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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내자정 189 |
|---|---|
| 주소 | 서울 종로구 내자동 188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12길 25-3 |
| 위치 고증 | 일제 관헌문서와『동아일보』기사에 신간회운동 당시와 사망 당시의 자택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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