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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광주학생운동 제1차 서울학생항일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학생운동
종류 거리
상태 부분변형 / 동성고등학교 앞 혜화동로터리 도로 확장과 고가도로 건설 등으로 당시의 모습이 크게 변형되었다.
정의 1929년 12월 9일 경신학교 학생 300여명이 가두로 진출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과 합류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으로,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1차 서울학생시위의 대표적인 현장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9 광주학생운동 제1차 서울학생시위
관련 조직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경신학교(儆新學校)/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관련 인물
관련 내용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한 서울지역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12월 2일 밤과 3일 새벽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서 총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이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의 학교와 시내 요소에 배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12월 5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이 집회를 열어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를 결의하였고, 6일에는 중동학교 학생들이,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각각 동맹휴학과 집회를 열어 항일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서울지역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일시위는 12월 9일 경신학교 학생들의 가두시위를 통해 촉발되었다. 이날 경신학교 학생 500여명은 조회시간에 학생대표의 ‘광주학생 지원’연설을 듣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교문을 나와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대가 혜화문안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부르자,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이 교문 밖으로 나와 시위 대열에 합세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대열을 둘로 나누어 제1대는 경성제국대학 앞을 지나 종로5정목으로, 제2대는 창경궁 앞을 지나 종로4정목으로 행진하던 중 제1대는 경성제국대학 앞에서, 제2대는 박석고개에서 일제 경찰에 포위되어 참가 학생 다수가 검거되었다. 그러나 포위망을 돌파한 일부 학생들은 다시 창덕궁 뒷산을 넘어 계동으로 진출해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과 합세하였다. 취운정 부근에서 대열을 정비한 학생들은 화동·팔판동·삼청동을 거쳐 효자동 쪽으로 나아가려다 경찰대의 진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날 가두시위를 계기로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서울 시내 각급 학교로 퍼져 나가자 일제 당국은 12월 13일 조기 방학을 실시하는 것으로 맞섰는데, 이로써 제1차 학생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참고 문헌 『조선일보』, 1929년 12월 28일, 호외 2면, 「경신과 보성이 연합한 시위 행렬, 두 대로 나누어서 행렬하려다가 9백여명이 일시 피착」.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399~401쪽.
김호일, 『한국근대학생운동사』, 선인, 2005, 267~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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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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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소
주소 서울 종로구 혜화동 90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조선일보』 1929년 12월 27일자 호외기사와 송상도가 지은 『기려수필』의 광주학생사건 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동성고등학교 앞 혜화동로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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