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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민긍호 등 연합 의병부대 전투지 - 천남동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산야
상태 변형 / 당시 지형에서 크게 변한 것은 없으나, 도로와 다리 등이 새로 놓였다.
정의 1907년 8월 이강년·민긍호 등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천남전투
관련 조직 이강년 의진 
관련 인물 이강년(李康秊), 윤기영(尹基榮), 민긍호(閔肯鎬), 박여성(朴汝成), 오경묵(吳敬黙), 정대무(丁大武)
관련 내용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의 강제해산으로 인해 해산한 군인들의 저항은 의병 봉기로 이어졌다. 일본군의 정면공세를 피함과 동시에 을미의병 이래 의병의 거점이 되었던 제천에 수십 개의 의진이 모여들었다. 이때 당시 모인 의진으로는 이강년을 비롯하여 윤기영, 민긍호, 박여성, 오경묵, 정대무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민긍호 등과 같은 해산 군인들은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무기고를 열어 상당량의 무기와 탄환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제천에는 스에야스[末安]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의 일본군이 8월 15일(음력 7월 7일) 원주 쪽에서 팔송(八松, 제천 봉양읍 팔송리)을 거쳐 들어오고 있었다. 제천에 있던 여러 의진들은 제대로 된 지휘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최초로 의병끼리 연합하여 전투를 벌였다. 「운강선생창의일록」에 의하면 이때 모인 의진은 전부 40여 진이었다고 한다.
급작스럽게 일본군의 경보가 있어 윤기영은 천남 뒷산에 매복하였고, 민긍호는 남쪽에 매복하였다. 오경묵과 정대무의 부대는 서울고개 좌우편에 복병하고 있었다. 이강년의 병력은 영월 쪽의 조을치까지 물러났다. 일본군은 저항없이 제천에 입성하였다. 저물녘에 매복하였던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조을치에 있던 이강년이 아사봉 관아 뒤에서 일본군을 역습하면서 4시간이 넘는 접전이 이어졌다. 「운강선생창의일록」에는 당시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 5백여 명이 죽고 13명이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피해 상황을 알린 첫 기록에서는 1명의 부상병이 있었다고 하며, 2차 보고에서 행방불명자 3인이 있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스에야스 중위가 거느린 1개 소대는 밤에 의병에게 공격당하여 17일 충주로 후퇴하였다.
천남전투는 해산군인과 포군 출신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올린 최초의 성과로, 이후 이강년은 도창의대장으로 임명된다.
참고 문헌 「지방행정」,『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8일.
「지방행정」,『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0일.
「지방행정」,『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1일.
「지방행정」,『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4일.
「参1發 第62號」, 1907년 8월 19일,『韓國駐箚軍司令官報告』.
「参1發 第63號」, 1907년 8월 19일,『韓國駐箚軍司令官報告』.
박정수,「운강선생창의일록」,『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224-225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78-27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84, 224~22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1984, 688쪽.
심철기, 「한말 원주 의병의 발전과정과 운동 방략」,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184~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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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제천군 근좌면 천남리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천암동 240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운강선생창의일록」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2008년 조사 당시 제천시청 문화관광과 권기윤의 도움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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