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용원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생가의 구조는 남아 있으나 1987년 개조하였다. |
| 정의 | 조선민족대동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용원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 의친왕 망명사건 |
|---|---|
| 관련 조직 | 조선민족대동단/대한민국임시정부 |
| 관련 인물 | 전협(全協)/나창헌(羅昌憲)/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
| 관련 내용 |
김용원(金庸源, 1892∼1934)은 휘문의숙 재학 중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조선총독과 일왕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해 전협·나창헌 등과 의친왕의 상하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으며, 의친왕 체포 후에는 자금을 모집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상임위원과 경무국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정부 외교후원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하고, 동북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준비하던 중 늑막염이 발생하여 귀국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요양을 마친 후 수원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또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활동하다 1927년 체포되어 2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3월 병이 재발하여 가석방되었다. 1928년 12월 또다시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4년 2월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지만 6월 형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용원 수형기록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용원 등 판결문」, 1924년 11월 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용원 판결문」, 1927년 2월 2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용원 신문조서(1924)」;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9:독립군자금모집 8, 국사편찬위원회, 1999. 『동아일보』, 1924년 9월 18일, 「 東大門署에 重大犯人」. 김상기 편,『애국지사 강산 김용원』, 경인문화사, 2004, 3∼32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 53 |
|---|---|
| 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5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용원 관련 「신문조서」에 의하면 주소는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 53번지이며, 본적은 주거와 일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4년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도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 53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위치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














북경에서 활동할 때의 김용원
김용원의 휘문의숙 졸업식 장면(1916년 3월 26일)
김용원 체포기사(『동아일보』, 1924년 9월 18일)
김용원 수형기록부
김용원 생가
김용원 수형기록부
김용원 생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