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안병찬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터에는 생가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
| 정의 | 홍주의병과 1919년 파리장서에 참여한 안병찬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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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안창식(安昌植)/안병림(安炳琳) |
| 관련 내용 |
안병찬(安炳瓚, 1854~1929)은 1854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에서 안창식(安昌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안창식은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갑오변란에 처하여 의병봉기를 준비하였으며, 1896년 홍주의병에도 참여하였다. 안병찬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자, 그는 김복한(金福漢)을 총수로 추대하고 의병을 봉기하였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06년 3월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민종식(閔宗植)을 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행군사마의 직을 띄고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는 1906년 3월 17일 청양의 합천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체포되었다. 한편 1906년 홍주의병에는 그의 동생인 안병림(安炳琳)과 족숙인 안항식(安恒植)도 함께 참여하였다. 안항식은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된‘홍주의병9의사’중의 한 명이다. 이후 안병찬은 1912년에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에는 파리장서에도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1929년 병사할 때까지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안병찬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7월 29일. 『대한매일신보』, 1929년 6월 7일, 2면 6단,「安炳瓚氏 長逝」. 김상기,「1895-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윤병석교수환갑기념논총』, 1990, 187-210쪽. 김상기,「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126-1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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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홍주군 화성면 신정 |
|---|---|
| 주소 | 충남 청양군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안병찬 판결문」과『중외일보』1929년 6월 7일자에 집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안병찬 증손 안선영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주춧돌이 일부 남아 있다. 바로 옆에는 안병찬을 모신 사당‘청대사’가 있다. |














멸실전 안병찬 생가
안병찬 생가 터에 남아있는 주춧돌
안병찬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년 7월 29일)
‘안병찬 생가지’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