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민긍호 피체지 - 등자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 피체지 건물은 없어지고 새로 집이 지어졌다. 현재 김남재씨가 거주하고 있다. |
| 정의 | 군대해산 후 의병항쟁을 전개하던 의병장 민긍호가 일본군에게 체포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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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민긍호(閔肯鎬, 미상~1908)는 한말 여흥민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를 지냈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령이 공포되자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장교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무기를 나누어주고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김덕제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원주읍을 장악한 다음, 일본군 정찰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격퇴시켰다. 8월 8일 이후에는 제천·충주·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약 7개월간 여주읍 습격 점령전투를 비롯하여 72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내며 일본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의병장으로 떠올랐다. 1908년 2월 22일 민긍호는 의병해산을 위해 파견된 선유사 박선빈의 전갈을 받고 부하 90명을 인솔하고 원주군 석경사로 향하였다. 그러다가 2월 27일 강림(講林) 박달고개 부근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물리치고 영월군 수주면 궐덕리에 주둔하였다. 29일 궐덕리 마을을 포위한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한국순사대를 상대로 오전 11시부터 3시간 30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일본군과 접전 중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환하려 하자 일제는 이를 두려워하여 29일 오후 11시경 민긍호를 사살하였다. 강림리 출신으로 이 지역 의병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는 장기성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월현2리 1184-3에서 민긍호와 그의 부하들이 휴식을 취하던 중, 구장이었던 동네 심씨의 밀고에 의해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강림 주재소(현 강림초등학교 뒤편)로 압송되었고, 그 날 저녁 의병들의 구출작전 중 일본군은 주재소 옆 건물(강림면 강림리 태종로 4길 49 앞터)에 잡혀있던 민긍호를 사살하고 그의 목을 잘라 원주수비대로 보냈다고 한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국가보훈처, 1970, 567-57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국가보훈처, 1971, 597-598쪽. 신용하,「민긍호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9-102쪽. 민덕식,「민긍호 의병장에 관한 일고찰」,『아시아문화』1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357-3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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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원주 치악산 강림 동방 약 10리 떨어진 등자치(登子峙) |
|---|---|
| 주소 |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2리 1184-3 |
| 도로명 주소 |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주천강로 857-27 |
| 위치 고증 | 『폭도사편집자료』(『독립운동사자료집』3권에 수록)에 의하면“영월군 수주면 강림에서 충주순사대 권경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강림리 출신인 장기성(81세)씨의 증언을 통해 그 위치를 파악했다. |














민긍호 순국지
강림주재소 터
민긍호 피체지 내부
민긍호 피체지 우측
민긍호 피체지 원경
민긍호 피체지 좌측
민긍호 피체지 정면
민긍호(오른쪽 첫번째)와 그의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