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경운궁(덕수궁)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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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종류 | 건물 |
상태 | 부분변형 |
정의 |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래 1919년 1월 승하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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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 |
관련 내용 |
경운궁(慶運宮)이 있던 자리는 본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로,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갔다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워졌다. 정릉동 행궁은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이 1611년(광해군 3) 복구공사가 마무리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조반정 후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아 있다가,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관에서 환궁해오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과 돈덕전(惇德殿) 같은 서양식 건물도 들어섰다. 1904년의 화재로 다수의 전각이 불타는 재난을 겪었는데, 이 때 궁궐 남쪽에 있던 인화문 대신에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꿔 정문으로 삼았다. 고종은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황위를 넘겨준 이후에도 1919년 1월 승하할 때까지 계속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궁호가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
참고 문헌 |
『서우』12, 1907년 11월,「문원(文苑)」, 39쪽. 『고종시대사』4, 1897년 2월 2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0, 322쪽. 이민원,「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경운궁」,『 한국독립운동사연구』2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1~24쪽. 「최신경성전도」(1907);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28쪽. 오다 쇼고[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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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한성부 서부 태평방 태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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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서울 중구 정동 5-1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위치 고증 | 「최신경성전도」(1907)에 경운궁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