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기삼연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생가 터에는 새 가옥이 들어서 있다. 후손 기호철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 기삼연의 생가의 사랑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
| 정의 | 한말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과 을사오적의 처단을 실행하였던 기산도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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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기산도(奇山度) |
| 관련 내용 |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의 자는 경노(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에서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유사 신기선이 파견되어 해산을 종용하자 장성의병을 주도한 기우만이 해산을 선언하였다. 기삼연은 이에 반발하며 재거의를 도모하다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 1907년 8월 말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전라도 지역의 후기의병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겨울이 되어 설날이 가까워오자 군사를 나누어 자신은 본진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서 추위를 피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상당수 의병들이 희생되었고, 기삼연은 순창 복흥의 친척집으로 피신하였으나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광주로 압송되어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산도(奇山度, 1878~1928)는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가 국민교육회 등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오적 중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을 처단하기 위해 오적암살단을 결성하였다. 1906년 2월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여 중상을 입혔으나, 이근택의 집 대청 위에 변장하였던 가발이 단서가 되어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의병항쟁을 계속하였고,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주도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출옥 후 유랑하다가 전남 고흥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1, 1970, 596-59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2, 1971, 611·613·623·626-63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의열투쟁사자료집, 1976, 29-30쪽.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8, 국가보훈처, 1980, 133-1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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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서이면 아곡 (아치실, 아치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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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전남 장성군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1, 『독립운동사자료집』2·3·9·11에서 기삼연·기산도의 관련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손 기호철(1965년생, 한국고전번역원) 씨의 증언과 현지 동행조사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독립운동자금 모집자 검거의 건(「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1919년 11월 5일)
기산도 관련기사(『동아일보』, 1922년 7월 3일)
기삼연 체포 보고문
기삼연 초상
기삼연·기산도 생가 터 정면
기삼연·기산도 생가 터 우측
기삼연·기산도 생가 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