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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암태도 소작쟁의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사회운동, 국내독립운동
종류 기타
상태 변형 /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일대는 경지정리와 도로확장으로 당시와는 모습이 달라졌으나, 여전히 농지로 활용되고 있다.
정의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1924~1925년 소작쟁의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3~1924 암태도소작쟁의
관련 조직 암태도소작인회(巖泰島小作人會)/아사동맹(餓死同盟) 
관련 인물 문재철/서태석/김용학
관련 내용 암태도(巖泰島)의 대지주 문재철(文在喆)은 마름을 둔 농장경영을 하였는데,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이 감소하자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하였다. 1923년 농장의 소작농들은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과 1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 비용은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작회원들은 추수를 거부하고 불납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지주는 소작인들을 개별적으로 협박·회유하면서 소작료 강제징수를 감행하였고, 목포경찰서에서도 수십 명의 경찰을 보내 시위순찰을 하였다. 소작인회는 순찰대를 조직하여 불납동맹을 보호하는 한편, 1924년 동와촌리에서 지주규탄면민대회를 개최하고 쟁의를 강화하였다.

일제와 지주의 탄압에 대항해서 소작인들은 수곡리의 문재철의 부친 문태현 송덕비를 파괴하다가 지주측과 충돌하였고, 이를 빌미로 일경은 소작인 50여 명을 체포하여 소작인회 간부 13명을 목포로 압송하였다. 암태소작인회·청년회·부녀회 등의 농민 1,000여 명은 6월 면민대회에서 목포로 가 항쟁할 것을 결의, 김용학(金龍學) 이하 600명의 농성단이 목포경찰서 앞에서 구속자 석방시위를 하였다.

이어 7월 600여 명의 농민들은 목포지청에서 아사동맹을 맺고 3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한 데 이어, 문재철의 집으로 가 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26명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쟁의에 전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잇따르자, 일제는 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7월 구속자 중 26명을 석방하고, 간부 13명도 1주일 내에 석방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일제는 문제 무마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개작업을 하여 8월 소작료 조정 약정서가 교환됨으로써 소작인 측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도소작인기념탑건립위원회에서는 1998년 8월 31일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참고 문헌 「서태석 등 15인 판결문」, 1924년 9월 1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4년 7월 8일, 「암태소작사건,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동아일보』, 1924년 7월 13일,「사설 : 암태사건」.
『동아일보』, 1924년 7월 13일,「암태소작사건, 전후경과를 상보」.
『동아일보』, 1924년 9월 2일,「암태소작의 쟁의해결, 문지주가 사할소작료 승락」.
조동걸,『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 한길사, 1979, 126~135쪽.
신안군지편찬위원회,『신안군지』, 신안군, 2000, 176~178쪽.
신안문화원 홈페이지(http://www.sinan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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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단고리
주소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543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동아일보』1924년 7월 13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암태도소작쟁의는 암태도 전역의 소작농·소작지와 관련된 사건이므로 특정 장소만을 지목하기는 어려우며, 소작쟁의 집회는 대부분 목포에서 열렸다. 따라서 상징성이 있는 현재의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주위를 관련위치로 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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