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 장진홍 의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지점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폭탄을 보내 폭파를 시도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7.10.18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폭파사건(장진홍의거) |
|---|---|
| 관련 조직 | 의열단 |
| 관련 인물 | 이내성(李乃成) |
| 관련 내용 |
장진홍(張鎭弘, 1895~1930)은 1927년 4월 동지인 이내성(李乃成)의 소개로 폭탄전문가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를 만나 폭탄제조법을 전수받았다. 이어 그는 고바야시 호지[小林峰治]로부터 다량의 다이너마이트·뇌관·도화선 등을 구입하여 직접 다수의 폭탄을 제조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그는 폭탄이 든 나무상자 4개를 신문지로 포장한 후, 덕흥여관(德興旅館)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에게 조선은행 대구지점, 슈도 모도요리[須藤素] 경상북도지사, 이시모토 켄[石本堅] 경상북도 경찰부장·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순으로 각 1개씩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박노선은 부탁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폭탄을 배달하였다. 이를 확인하던 직원이 놀라서 나무상자를 길거리에 내놓았으나, 이미 폭탄이 작렬하였다. 이 폭발로 일본 경찰과 은행원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유리창 70여 장이 깨졌다. 이 거사가 터지고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3일 장진홍은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상형을 언도받고 상고했으나, 같은 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 사형이 확정되자 같은 달 31일 자결 순국하였다. 이 의거는 의열단이 지향한 독립운동의 방략과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의거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장진홍 등 2인 판결문」,1930년 4월 2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장진홍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 「 대구폭탄사건 판결, 장진홍은 사형에」. 『매일신보』, 1930년 8월 2일, 「사형집행을 앞두고 폭탄범 장진홍옥사?, 삼십일일 오전 뇌일혈로, 시체는 유족에게 내어주었다」.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大邱地籍圖」,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319~322쪽. 김의환, 「장진홍의 생애와 그의 의열투쟁」, 『대구사학』 12·13, 대구사학회, 1977, 287~30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808~81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647~671쪽. 사)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 新택리지』, 북랜드, 2007, 361~362쪽. 향토역사관, 『옛 사진으로 본 근대대구』, 향토역사관, 2008, 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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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상정 |
|---|---|
| 주소 | 대구 중구 포정동 58-1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33 |
| 위치 고증 | 「장진홍 등 2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향토역사관 이호 학예사의 증언과 1927년 발행된 「대구지적도」를 통해 현장을 확인하였다. 현재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지점이 들어서 있다. |














장진홍 의거 관련기사(『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1:10,000(昭和12年修正測圖)」, 1937,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정면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