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만수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원래의 건물은 멸실되고, 현재 그 위치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4년 4월 하얼빈에서 일본총영사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순국한 김만수의 생가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길남장/서로군정서/건국청년모험단 |
| 관련 인물 | 이상룡/최병호/유기동 |
| 관련 내용 |
김만수(金萬秀, 1894~1924)는 안동군 풍북면 오미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봄 김만수는 이상룡(李相龍)이 중국 화전현(樺甸縣)에 설치한 병영(兵營)인 길남장(吉南庄)의 군사가 되었다. 1922년 서로군정서에서 헌병대를 새로 조직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1924년 4월 김만수는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고등정탐부장 쿠니요시[國吉精保]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갔다. 이들이 장춘(長春)과 하얼빈에서 한국인들에게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김만수는 동지 10여명을 모아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고, 최병호(崔炳鎬)·유기동(柳基東)과 함께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하얼빈의 합부(哈埠) 남십팔도가(南十八道街)에 위치한 중국인 집에 방 한 칸을 얻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이 기밀이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들어갔다. 1924년 4월 9일 일본 경찰은 중국 군대와 교섭하여 200여 명의 군대를 끌고 기습에 나섰다. 김만수는 끝까지 항거하며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 경찰 10여 명을 사살하고, 최병호·유기동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들의 유해는 현지 동포들의 손으로 조선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독립신문』, 1924년 4월 26일, 「할빈에서 발생한 우리 독립군의 참극」. 이상룡, 『국역 석주유고』 상,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08, 714~71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390~391쪽. 김각현, 『풍산김씨 허백당세적』, 대지재소, 1999, 450쪽. 김희곤·강윤정,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09, 160~16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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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 |
|---|---|
| 주소 |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343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미동길 134-17 |
| 위치 고증 | 『독립신문』 1924년 4월 26일자 기사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후손이 건립한 「순국선열 김만수 의사 생가지」 표지석과 마을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김만수를 비롯한 세 의사의 투쟁을 쓴 삼의사합전(이상룡,『 석주유고』)
김만수 생가 터 표지석
김만수 생가 터 후면
김만수 생가 터 전경
김만수 생가 터 좌측
김만수 생가 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