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원식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김원식의 집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아 있다. |
| 정의 | 서로군정서·정의부·민족혁명당 등에서 활약한 김원식의 집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서로군정서/한족노동당/농민호조사/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대한동의부/정의부/중한항일의용군/신한독립당 |
| 관련 인물 | 김원식(金元植)/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이광민(李光民)/김원봉(金元鳳)/김규식(金奎植)/이청천(李靑天) |
| 관련 내용 |
김원식(1888~1940)은 안동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20년 임시정부 자금지원 활동을 펼치다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로군정서에 몸을 담은 김원식은 1921년 독판 이상룡의 지령을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파견원으로 북경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앞장섰다. 또한 그해 11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6년 11월 중앙집행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다. 1927년 4월 김동삼·이광민 등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힘썼다. 1927~1928년에는 정의부 대표로 3부 통합회의에 참여하여 분열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혁신의회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던 김원식은 1932년 4월, 상해로 잠입하여 김원봉·김규식 등과 함께 중한항일의용군을 결성하였다. 1933년 동녕현전투 이후 이청천과 함께 중국관내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신한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협동전선체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0년 1월에 작고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용의조선인명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70쪽. 경사유방편찬위원회,『경사유방』, 1974, 455~458쪽. 김희곤,『안동 독립운동가 700인』, 안동시, 2001, 134~1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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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
|---|---|
| 주소 |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42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부루골길 17 |
| 위치 고증 | 「용의조선인명부」에 관련 사실과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과 마을주민 김용수의 증언이 일치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원식
김원식 집터 우측
김원식 집터 전경
김원식 집터 좌측
김원식 집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