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봉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재는 신식 양옥집들이 들어서 있고 일부는 초읍교회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 정의 | 만주지역에서 교육활동 및 독립운동을 한 이봉우의 집이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무오독립선언/1921 자유시참변 |
|---|---|
| 관련 조직 | 국민회/대한독립기성총회/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독립군 |
| 관련 인물 | 이동휘/구춘선/마진/김교헌/박은식/안창호/김동삼/강봉우/고용환/강구우/박승필/유예균/최원일 |
| 관련 내용 |
이봉우(李鳳雨, 1873~1921)는 1873년 7월 1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백단(白旦), 이명은 봉우(奉雨)이다. 1908년에 간도로 갔고, 1910년 허룽현[和龍縣]에서 정동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힘썼다. 1914년 북간도 장재촌(長財村)에서 이동휘(李東輝)·구춘선(具春先)·마진(馬晋) 등이 조직한 국민회(國民會)에 가담하여 교육활동에 주력하였고, 음력 1918년 11월 김교헌(金敎獻)·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김동삼(金東三) 등 39인이 독립선언서를 선포할 때 북간도국민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룽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만세시위 중 중국군이 발포한 일로 구춘선·강봉우(姜鳳雨)·고용환(高容煥)·강구우(姜九禹)·박승필(朴昇弼)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책임을 따지기도 하였다. 그해 4월 대한독립기성총회의 의사부원으로서 구춘선·마진·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독립기성총회가 임시정부 산하의 국민회로 개편됨에 따라 군자금 모집과 군비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청산리전투 후 대한독립군이 러시아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자유시사변이 일어나자, 1921년 9월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국민회 대표로 재만단체성토문(在滿團體聲討文) 및 군정의회선포문을 발표하였다. 그뒤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하여 상하이로 가던 중 일본관헌에게 피살되었다. 1980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간도일본총영사, 「연길교육회 및 연구회의 행동에 관한 정보」(公信195호), 1910년 10월 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6, 694쪽. 국가보훈처, 『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1997, 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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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동래군 서면 초읍 469 |
|---|---|
| 주소 |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469-1 |
| 도로명 주소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월드컵대로449번길 38 |
| 위치 고증 |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0권과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기사를 통해 관련 사실을 알 수 있고, 「제적등본」과 「토지대장」을 통해 주소와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봉우 집터 우측면
이봉우 집터 좌측면
이봉우 집터 우측면
이봉우 집터 정면
이봉우 집터 측면
이봉우 집터 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