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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양산경찰서 터 양산농민조합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사회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현재는 멸실되어 없고 대신 노인회관이 들어서 있다.
정의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조합원 300여 명과 소년부원 50여 명이 이틀에 걸쳐 조합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전병건(全秉健)/김외득(金外得/德)/윤복이(尹福伊)/김태근(金泰根)/최달수(崔達守)/김장호(金章浩)
관련 내용 1931년 4월 결성된 양산농민조합은 일본인 대지주 등이 흉년인데도 불구하고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며 소작료 4할을 결의하는 등 소작관행을 혁신하고자 노력하였다. 1932년 2월에는 새 집행위원장으로 전병건(全秉健)을 선임하고 역시 소작료 4할을 결의하는 한편, 3월에는 조합원의 확대와 농민의 단합을 위한 연설회를 상북면 석계리 및 대석리 일대에서 진행하였다. 이때 일제경찰은 조합원 간부 18명을 검거하여 양산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였다.

그러자 양산농민조합 조합원들은 구속 간부의 무조건 석방 및 불응시 조합간부의 탈환을 계획하였다. 이후 구속된 조합원들이 17일 새벽 부산으로 압송된다는 소문이 나자 3월 16일 김장호·김외득·김태근·최달수 등을 선두로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에 진입하여 수감자들의 무조건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산경찰서는 공포탄을 쏘며 저지하였지만 더욱 시위대가 강경해지자 양산경찰서장은 실탄을 시위대에 발포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 등이 부상을 입었고 급보를 접한 경남경찰국의 무장경찰 70여 명의 파견으로 주모자가 검거되고 강제해산되었다. 다시 소년부원 50여 명이 새벽 3시에 경찰서 유치장을 습격하여 구속간부 탈환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증원된 경찰병력을 뚫지 못하고 정문에서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다가 30여 명의 소년부원이 피검되었다. 이 사건으로 양산농민조합원 80여 명이 검거되고 불구속 100여 명을 포함하여 200여 명이 조사받았다. 1932년 7월 23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소요죄로 17명이 기소되고 3명이 불기소처분을 받는 등 양산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중 상당히 규모가 큰 운동 중 하나였다.
참고 문헌 조선총독부,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양산」, 1918.
「대일본직업별명세도; 제194호 조선 남부」, 1930.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양산군 읍내면 북부동 지적원도」, 1912.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93~95쪽.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양산농민조합소요사건판결」, 『사상월보』 2-12, 1933, 20~30쪽,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성운, 「일제하 경남 양산지역의 혁명적농민조합운동」, 『芝邨金甲周교수 화갑기념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94.
양산향토사연구회,『 (증보판)양산항일독립운동사』, 양산시민신문, 2009, 182~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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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북부동
주소 경남 양산시 북부동 331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고등경찰관계적록』 및 「양산농민조합 소요사건 판결」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양산군 읍내면 북부동 지적원도」·「조선오만분일지형도; 양산」·「대일본직업별명세도 제194호 조선남부」등에서 양산 및 물금지도와 상호 비교하여 현재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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