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대지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생가는 사라지고 다른 대지에 포함되어 있다. |
| 정의 | 일합사·대한민국임시정부·의열단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곽재기의 밀양폭탄사건에 관여했던 김대지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밀양폭탄사건 |
|---|---|
| 관련 조직 | 일합사/대한민국임시정부/의열단/신민부/정의부/참의부 |
| 관련 인물 |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윤치영(尹致衡)/전홍표(全鴻杓)/고인덕(高仁德)/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회영(李會榮) |
| 관련 내용 |
김대지(1891~1942)는 김경수(金景守)와 정라(丁羅) 사이의 장남으로 말양군 부내면 내이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황상규·윤치형·안확·이영재·이각(李覺) 등과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다. 또한 황상규·고인덕과 함께 동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1917년 만주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이시영·조소앙·이회영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조사원으로 임명되어 밀양의 책임자로도 활동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에 음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같은해 3월에는 곽재기의 밀양폭탄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계속하여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항일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삼부통합을 위해 힘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의료업(醫療業)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10월 26일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 1921년 6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9년 9월 6일,「임시정부 의정원 임시회록」.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97쪽. 朝鮮總督府,『國外二於亇儿容疑朝鮮人名簿』, 朝鮮總督府, 1934, 5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91~94·660~67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6, 312~317쪽. 姜大敏, 「一峰金大池의 抗日獨立運動」, 『釜大史學』19, 釜山大學校史學會, 1995, 563~596쪽.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158~16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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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847 |
|---|---|
| 주소 | 경남 밀양시 내이동 847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백민로4길 14 |
| 위치 고증 | 『국외에서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김대지의 부친 김경수의「제적등본」을 기반하여「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대지
김대지 생가 터 전면
김대지 생가 터 우측
골목에서 바라본 김대지 생가 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