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흥학교 학생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교사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본관건물의 포치가 현장에 남아있고 당시의 강당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 정의 | 전주 3·1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 및 신사참배거부운동이 있었던 신흥학교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1930 광주학생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고형진(高衡鎭)/남궁현(南宮炫)/김병학(金秉學)/김점쇠(金点釗)/이기곤(李起坤)/김경신(金敬信)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13일 신흥학교 학생 및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천주교 건너편에서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하고, 12시 20분 경 남문 밖 시장 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현 완산학교) 교정 부근까지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를 주도한 신흥학교 학생들은 고형진·남궁현·김병학·김점쇠·이기곤·김경신 등으로 모두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와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여 1월 25일 아침에 학생 7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 때 학생 36명이 검거되어 15~29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7년 19월 5일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폐교령이 내려지기 전에 자진 폐교하였다. 신흥학교는 1900년 미국 예수교장로학파 레이놀즈 선교사가 희현당 옛 터에 신학문학당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1907년 희현당 북쪽에 기와집 8칸을 신축하고 신흥학교로 학교명을 개칭하고 80평 대지에 2층짜리 벽돌건물을 신축하여 고등과 학생도 모집 수용하였다. 1927년 3층 본관 건물을 지었다. 1937년 신사참배 강요를 받자 자진 폐교하였다가 해방 후 1946년에 재인가를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관은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본관 포치와 1933년에 신축한 강당은 국가등록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
| 참고 문헌 |
「전주안내도」, 1931. 『동아일보』, 1930년 1월 24일, 「全州新興校 突然 休學宣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7, 327쪽. 『전주시사』, 전주시, 1986, 486쪽. 전주부사국역편찬위원회,『국역 전주부사』, 전주시, 2009, 4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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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면 화산정 188 |
|---|---|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188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30년 1월 24일자 기사 및 『독립운동사자료집』13권에 관련 사실이, 『국역 전주부사』에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1931년에 발행된「전주안내도」를 참고하였다. |














1920년대 신흥학교 전경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가는 신흥학교 학생들(1920년대)
신흥학교 강당 우측면
건축 중인 본관 건물(1927년)
신흥학교 강당 좌측면
신흥학교 동맹휴학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0년 1월 24일)
전주 3·1운동기념비
위에서 바라본 신흥학교 본관 터
신흥학교 강당 정면
화재 후 남은 신흥학교 본관 포치
폐교 당시 5학년 학생 전원이 학교를 상징하는 S자를 남김(1937년 9월 22일)
신식교육을 받고 있는 신흥학교 학생들(1915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