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학생운동 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1928년 4월 완공된 건물이 현재 남아 있어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 정의 | 1928년 11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 소녀회를 조직하고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9 광주학생운동 |
|---|---|
| 관련 조직 | 소녀회 |
| 관련 인물 | 장매성(張梅性) |
| 관련 내용 |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28년 11월 장매성의 주도로 비밀결사 소녀회가 결성되어 민족독립과 여성해방 문제를 토론하며, 독서회 중앙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남학생들과 같이 독립운동 역량을 기르는 데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에서의 격투로 비화된 한·일 학생들의 충돌 이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들과 연합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12일의 시위에는 학교측의 경계가 엄중하고 정문이 폐쇄되어 동참할 수 없었으나, 14일 기숙사생들이 교내에서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치며 사감실에 돌을 던졌으며, 15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투쟁했다. 1930년 1월 13일에는 수감 중인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3학년생 전원이 백지동맹을 하여 많은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27년 5월 개교했으며, 1938년 4월 광주욱(旭)공립고등여학교로, 1945년 6월 전남공립여자중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
| 참고 문헌 |
「장매성 등 판결문」, 1930년 10월 6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30년 1월 19일, 「광주여자고보생 11명은 감옥에, 열두 명 중 한 명만 방면」. 『동아일보』, 1930년 1월 20일, 「부형호출 권고로 20여 명 우(又) 퇴학, 퇴학원서는 속속 제출 중」. 『동아일보』, 1930년 1월 21일, 「차입기금 모집, 방면 전에 시험에 불응, 학생들이 모이어서 결의」. 『조선일보』, 1930년 1월 15일, 「여고보 3년도 전부 백지, 이광춘 양의 연설」. 『조선일보』, 1930년 1월 20일, 「광주여고보생 다수 퇴학 처분, 사십여 명을 퇴학처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9, 1977, 543∼544쪽. 강재언 편,『광주항일학생사건자료』, 풍매사, 1979, 43∼45쪽. 광주직할시사편찬위원회 편,『광주시사』2, 1993, 711쪽. 박선홍,『광주 1백년』1, 금호문화, 1994, 146∼147쪽. 광주민속박물관,『일제강점기 광주문헌집』, 2004, 92쪽. 김성민,『광주학생운동연구』, 국민대 박사학위논문, 2006, 146∼147·154∼155쪽. 전남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http://chonnam-go.h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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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욱정 |
|---|---|
| 주소 | 광주 동구 장동 39-12 |
| 도로명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158번길 8 |
| 위치 고증 | 『광주항일학생사건자료』·「장매성 등 판결문」등 자료와『독립운동사』9권·『광주고보·서중·일고 80년사』등 논저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터가 현재 전남여자고등학교임을 전남여자고등학교 및 구내에 세워진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에서 확인하였다. |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1930년대)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인 이광춘과 박기옥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우측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좌측 정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우측(현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좌측
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