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한봉근·한봉인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당시의 집은 사라지고 다른 집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의열단 결성 및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한봉근·한봉인 형제가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 밀양경찰서 투탄의거/1926 경북폭탄의거 |
|---|---|
| 관련 조직 | 의열단(義烈團) |
| 관련 인물 | 나석주(羅錫疇)/김창숙(金昌淑)/이종암(李鍾巖)/윤세주(尹世胄)/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김원봉(金元鳳)/유석현(柳錫鉉)/남영보(南寧保)/이현준(李賢俊)/김창숙(金昌淑)/유우근(柳友槿)/이승춘(李承春)/김원석(金元錫)/최경학(崔敬鶴)/김재수(金在洙) |
| 관련 내용 |
한봉근(韓鳳根, 1894~1927)은 한춘서(韓春瑞)와 김해옥(金海玉)의 장남으로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김원봉·윤세주 등과 밀양공립보통학교를 함께 다녔고 1919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을 조직 가담하였다. 1920년 김원봉(金元鳳)·신철휴(申喆休) 등과 상의하여 폭탄, 권총, 탄약 등을 입수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입수된 무기로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수행하기 위해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였다. 1923년 12월 의열투쟁을 위해 유석현(柳錫鉉)·남영보(南寧保)·이현준(李賢俊) 등과 함께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서울로 반입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1926년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이 모금한 3천 원으로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고자 하였다. 유우근(柳友槿)·이승춘(李承春)·나석주(羅錫疇) 등과 함께 추진하였다가 최종적으로 나석주가 단독으로 입국하여 투척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인(韓鳳仁, 1898~1968)은 한봉근의 동생으로 숙부 한춘옥의 거금 10원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의열단을 결성하고 1920년 12월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김원석(金元錫)·최경학(최수봉) 등과 밀양경찰서 투척의거에 가담하였다. 1925년 의열단 군자금 모집 밀양지역 지구책으로 활동하면서 이종암·김재수·이병택 등과 함께 무기와 폭탄의 국내 반입에 관련되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1926년 12월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밀양군 부내면 가곡동 지적원도」, 19112. 「이종암 등 9인 판결문」, 1926년 11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 1921년 6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요시찰인명부』, 조선총독부 아세아국, 1925년 2월 17일.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97~104·197~199·234~236·243~24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387~412·660~67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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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 557 |
|---|---|
| 주소 | 경남 밀양시 가곡동 55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두 사람의「제적등본」 상의 주소지를 토대로 「밀양군 부내면 가곡동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와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한봉근 요시찰인명부(조선총독부 아세아국, 1925년 2월 17일)
경북폭탄사건 관련기사(『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
한봉인
좌측에서 본 한봉근·한봉인 집터 근경
한봉근·한봉인 집터 우측
좌측에서 본 한봉근·한봉인 집터 및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