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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교재 생가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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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현재 가옥은 멸실되었고, 집터는 3개의 지번으로 나뉘어 3채의 가옥이 신축되어 있다.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 연락책으로 활동한 이교재가 태어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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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갈돕회 
관련 인물 김구(金九)/조완구(趙琬九)
관련 내용 이교재(李敎載, 1887~1933)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교재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체포되었는데,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과 국내 연락책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통영의 김종원(金宗元)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3년 9월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되돌아가려다 신의주 국경에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이교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서 갈톱회를 조직해 고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주었다.

1931년 이교재는 국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같은 해 11월 20일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장이었던 김구(金九)와 내무장 조완구(趙琬九)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았다. 상주대표로써 그가 맡은 임무는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연락책 역할을 하는 것과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는 일,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일 등이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한 이교재는 진주·대구 등지를 돌아다니며 은밀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마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제는 그를 강제 출소시켰다. 석방된 지 10여 일 만인 1933년 2월 14일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馬山府 鎭田面 五西里 地籍原圖」, 1914.
「이교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교재 집행원부」, 1919년 9월 8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이교재 형사사건부」, 1923년 12월 20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 「李敎載氏 永眠」.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마산 창원 역사읽기』, 도서출판 불휘, 2003, 141~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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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이교재 공적조서」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교재 형사사건부」 및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제적등본」을 통해 출생, 사망한 곳의 지번을 확인하였고, 자부인 허정수(87)씨의 증언으로 관련 사실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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