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노응규의병 주둔지 - 진주성 선화당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진주성 전체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나 선화당은 멸실된 상태로, 현재 그 터에는 청계서원과 경절사가 자리잡고 있다.
정의 노응규의진이 진주성을 점령했을 때 주둔하였던 장소로, 지휘소를 설치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896.2.20~4.24 진주의병(노응규 의진)의 진주성 점령
관련 조직 본부의소(本府義所)/본부의진(本府義陣)/병영의소(兵營義所) 
관련 인물 서재기(徐再起)/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송병선(宋秉璿)/성경호(成慶昊)/정한용(鄭漢鎔)/허전(虛傳)/노응규(盧應奎)/최익현(崔益鉉)/임경희(林景熙)
관련 내용 진주의병 의병장 신암(愼菴) 노응규(盧應奎, 1861~1907)는 경남 안의 사람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으로 삼아 그의 문인들과 함께 거의하였다. 1896년 2월 19일 진주에 도착한 노응규 의진은 진주향교에 대기하였다가, 20일 새벽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노응규 의진이 진주성을 장악하자 진주의 유림들은 따로 의병을 조직하고 정한용(鄭漢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노응규 의진은 진주성 내 진주관찰부에, 정한용 의진은 진주성 밖 진영(鎭營)에 포진하였는데, 각각 본부의소(本府義所)와 본주의소(本州義所)라고 칭하였다. 노응규는 진주관찰부의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에 지휘소를 두고 기거하였다.

노응규·정한용의 진주의병은 몇 차례 관군을 격퇴하였고, 일본인의 근거지인 부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4월 10일 경 부산을 지척에 둔 김해에서 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 끝에 회군한 후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4월 24일 관병 7백 명과의 전투 결과 노응규 의진은 진주성에서 패퇴하였고, 삼가의 정한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결국 봉기 2개월여 만에 의거는 실패로 끝났다. 고종으로부터 의거를 일으킨 일에 대해 용서를 받은 후, 노응규는 동궁 시종관 등의 공직에 복무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관직을 버리고 다시 한번 의거를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하던 중 1907년 1월 황간에서 체포되었고, 그해 2월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896년 의거 당시 노응규가 지휘소로 사용하였던 선화당은 1895년 설치된 진주관찰부의 중심 건물로, 이후 경상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경상남도 관찰사와 도장관의 집무실 역할을 해왔다. 멸실 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그 터를 확인하였으나, 현재까지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참고 문헌 「진주군지도」, 1899.
박영석,『주한일본공사관기록』8, 국사편찬위원회, 1993, 238-250쪽.
한수, 『진주 선화당 복원예정부지 발굴조사 보고서』, 국립진주박물관, 1998, 11-20ㆍ71-72쪽.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진주군 성내면 1동
주소 경남 진주시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주한일본공사관기록』「京第6號」(1896.3.17)·「京第9號」(1896.2.23)와「진주군지도」를 통해 의거 사실 및 진주관찰부 선화당 위치를 확인하였다. 한편,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시 남성동 167-11번지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옛 선화당의 존재를 입증한 바 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