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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동아개진교육회 활동지 - 낙육재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낙육재는 완전히 멸실되었으며, 그 터에는 현재 진주 백병원이 건립 중이다.
정의 1896년 유생들이 동아개진교육회를 조직하여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거를 계획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897. 관립진주낙육학교로 개편||1905.12. 일본헌병대가 낙육학교에서 유생들을 강제해산||1908. 낙육학교 폐쇄||1896. 낙육재 설치
관련 조직  
관련 인물
관련 내용 낙육재는 1721년 경상도 대구의 경상감영 내에 설치된 것이 시초로, 유능한 유생을 선발해 독서와 학술연구 등에 종사케 한 관립서재이다. 1896년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고 경상남도 감영이 들어서면서 진주에도 낙육재가 설치되었다. 이 때 군대가 주둔했었던 토포영(討捕營) 건물을 고쳐서 학당으로 사용했다. 설립 1년 뒤인 1897년, 관립진주낙육학교(官立晋州樂育學校)로 개편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직후 청년 유생들은‘동아개진교육회(東亞改進敎育會)’라는 이름 아래 낙육학교에 모여 일제 관서 등을 습격하기로 하고 혈서로 연판장을 작성하는 등 의거를 계획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일본군 헌병대와 60명 내외의 일본인 거류민이 갑자기 낙육학교를 습격하여 강제해산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민심이 매우 흉흉해져 일본인 거류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하고 폭약까지 직접 제조하여 의병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이후 낙육학교는 1908년 경 폐쇄되었다. 1908년 2월 재정부족으로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와 1909년 11월 학교 폐쇄가 1년 가까이 되었다는 기사를 볼 때, 표면적인 이유는 경영난이라 하겠으나, 군대해산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낙육학교가 다시 반일구국운동의 거점이 될 것을 두려워 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낙육학교 폐쇄 후 그 터에는 1910년 진주공립실업학교, 1923년 도립 자혜의원(1925년 도립 진주의원으로 개칭)이 들어섰으며, 1983년 진주의료원이 되었다가 2008년 의료법인 복음병원에 매각되었다.
참고 문헌 『황성신문』, 1908년 2월 25일, 1면 6단,「晋校方針」.
『경남일보』, 1909년 11월 16일, 3면 6단,「何故久閉」.
『경남일보』, 1910년 3월 29일, 2면 5단, 「實業設校」.
伊作友八,『진주안내』, 진주개문사, 1914, 5쪽.
勝田伊助,『진주대관』, 진주대관사, 1940, 15ㆍ20ㆍ28-29쪽.
김경현,『진주이야기 100선』, 진주문화원, 1998, 85-87쪽.
「(51)東亞開進敎育支會 근황 보고 移牒(1905-12-2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42)大邱鎭衛隊 행동에 대한 보고 移牒(1905-12-15)」, 『주한일본공사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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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진주군 중안면
주소 경남 진주시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촉석로 178
위치 고증 『진주안내』와『진주대관』에 낙육재에서의 유생들의 의거 계획과 일본 헌병대의 진압 사실이 명시되어 있으며, 당시 위치가 중안면이었고 실업학교와 도립 진주의원 자리였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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