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민용호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구입 후 여러차례 개증축을 거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일부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있다. |
| 정의 | 관동창의군 의병장 민용호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69. 산청군 오부면 오곡리에서 민용호 출생||1889 - 1889 금서면으로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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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민용호(閔龍鎬, 1869~1922)의 본관은 여주이고, 일명 진호(晋鎬)라고도 하며, 호는 복재(復齊)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오곡리에서 민치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7세에 부친이 급사하자 가세가 기울어 산청군 금서면 오봉산으로 이거하여 화전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20세 무렵까지 기정진(奇正鎭)의 문인 민치량(閔致亮)에게서 수학하면서 위정척사 사상을 물려받았으며, 25세 경 한성으로 옮겨 민치우(閔致禹)의 양자가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그는 원주·평창·진부를 거쳐 1896년 1월 강릉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점령한 후,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儀所)를 설치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3월 개항장인 원산을 공격하려 했으나, 일본 헌병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이후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 전력을 정비한 뒤, 6월에는 고성·양양 등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의병토벌과 고종의 해산령 등으로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1897년 8월 고종의 소환조칙을 받고 귀국하여 잠시 관료의 길을 걸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요양하다가, 1922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민용호,『관동창의록』, 국사편찬위원회, 1984, 295쪽. 이상찬,「1896년 의병장 민용호의 실체」,『규장각』20, 1997, 17-29쪽.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아카데미, 1998, 79-151쪽. 오주환,『산청향토사』, 도서출판 신우, 2005, 404-40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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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 1033 |
|---|---|
| 주소 | 경남 산청군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로312번가길 6 |
| 위치 고증 | 민용호의 유고『복재집』에는 출생지를 산청군 오부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친필기록 「관동창의록」에는 17세에 금서면 오봉산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의병연구가 이태룡의 연구와 현 거주자 민영한(1932년 생)의 증언에 따라 위치를 비정하였다. |














민용호 격문(1896)
민용호
민용호 집 마당
민용호 집 전경
민용호 집 아래채
민용호 집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