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고사훈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빌라와 단독주택 등이 들어서 있고, 지번 분할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
| 정의 | 1909년 3월 제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고사훈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9 제주의병운동 |
|---|---|
| 관련 조직 | 제주의병 |
| 관련 인물 | 이중심(李中心), 노상옥(盧尙玉), 김석명(金錫命), 조병생(趙丙生), 김재돌(金在乭), 양남석(梁南錫), 양만평(梁萬平), 김만석(金萬石), 한영근(韓永根) |
| 관련 내용 |
1909년 제주의병의 의병장이었던 고사훈(高仕訓, 1871-1909)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1133번지에서 고영길(高永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7월 그는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에게서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본격적인 의병운동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김석윤(金錫允)·노상옥(盧尙王) 등과 더불어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제조하였다. 그리고 화북리 황사평에서는 의병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09년 2월 25일 고사훈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고사훈·이중심(李中心)·김석윤 외 6명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 거주하는 한영근(韓永根) 등 총 10명이었다. 회합에서 창의자들은 거사일을 1909년 3월 3일, 거사 장소를 관덕정으로 결정하고 의병장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창의 당일 고사훈·김만석(金萬石)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윤·양만평(梁萬平)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사훈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계획하였다. 고사훈은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 또 대정성의 북문 밖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대는 대정주재소의 예측과 달리 대정성을 습격하지 않고 2월 28일 대정군의 중면 광평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3월 1일 이른 아침 급습한 경찰에 의해 고사훈은 체포당하고, 3월 4일 의병 김만석과 함께 순국하였다. |
| 참고 문헌 |
「濟警秘發제36호의 3」,『暴徒에 관한 篇冊』, 경무국, 1909. 김동전,「1909년 제주의병의 실상과 의의」,『성주』5, 고씨종문회총본부, 1995.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김찬흡,『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문화원, 200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책1(의병항쟁재판기록), 고려서림, 1984, 711~712쪽. 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항쟁사-기유제주의병항쟁편』, 제주항일기념관, 2016, 87~126쪽.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 「제주에 의병」.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제주군 중면 이도리 1133 |
|---|---|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광로 10길 35-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暴徒에 관한 篇冊』중「濟警秘發제36호의 3」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유족 고경호의 제적등본에 기재된 본적을 근거로 위치를 비정하였다. |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
고사훈 관련기사『( 신한민보』, 1909. 4. 14)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
고사훈 생가 터 전경(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