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열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박열의 집은 없어지고, 문경시에서 새로 복원하였다. |
| 정의 | 일본에서 의열투쟁을 펼친 박열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흑도회/불령사 |
| 관련 인물 | 정태신/김약수/정태성/조봉암/가네코 후미코 |
| 관련 내용 |
박열(朴烈 ; 본명은 朴準植, 1902~1974)은 경북 문경 출신이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박열은 1919년 10월경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정칙(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박열은 1921년 정태신(鄭泰信)·김약수(金若水)·정태성(鄭泰成)·조봉암(曺奉岩) 등과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만들었다. 박열은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흑도회의 기관지『흑도』의 발간을 맡았다. 1922년에는 니가타현 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항의투쟁을 이끌었다. 1923년 4월에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그러던 중 1923년 가을에 열릴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그곳에 폭탄을 던져 황태자와 정부고관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간토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박열은 1923년 8월 체포되었고, 폭탄구입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박열은 1926년 2월 26일 첫 공판정에서“한인이 일본 국민에게 반항하는 것은 항구적인 운명”이라고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그는 대역죄와 폭발물취체규칙위반으로 1926월 3월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같은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령을 받았다. 1945년 10월 27일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의 긴 옥고를 치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박열 신문조서」. 「박준식 등 15인 판결문」, 1925년 7월 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삼웅,『박열 평전』, 가람기획, 1996, 86~88쪽.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3~29·220~223쪽. 김명섭, 「朴烈·金子文子의 반천황제 투쟁과 아나키즘 인식」, 한일민족문제연구, 2003.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 |
|---|---|
| 주소 |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박열 신문조서」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제적등본과『항일독립투사 박열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의 저자 황용건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박열 출옥 환영대회 사진
박열 의거 보도기사(『조선일보』, 1925년 11월 25일)
박열
박열 집 우측
박열 집 원경
박열 집 좌측
복원된 박열 집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