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나운규 거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영천시장 안에 위치해 있는데, 영천동 70-22는 70-20과 70-10 사이에 끼여 있는 3평 전후한 삼각형 쪽방 수준의 작은 공간이다. |
| 정의 | 한국영화의 이정표를 제시한 영화인 나운규가 지병으로 사망할 당시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1926 아리랑 개봉 |
|---|---|
| 관련 조직 | 예림회/조선키네마주식회사/나운규프로덕션 |
| 관련 인물 | 윤봉춘(尹逢春)/안종화(安鍾和)/윤백남(尹白南) |
| 관련 내용 | 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마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3·1운동 당시 회령에서 윤봉춘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1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 잠시 생활하다가, 1924년 예림회 단장 안종화의 주선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배우연구생으로 입사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영화에 첫 출연한 것을 계기로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인 「심청전」의 심봉사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을 제작해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아리랑」은 예술성과 민족정신을 살린 동시에 흥행에도 성공해 한국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해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수준 높은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을 발표했다.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지만 이후 무절제한 생활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런 가운데 재기를 위해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1937년 생을 마감하였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37년 8월 10일, 「떨어진 明星!:눈물의 영화 아리랑 주인공, 나운규씨 금일 요절」. 『동아일보』, 1937년 8월 10일, 「조선영화계의 공로자 고나운규씨의 업적, 출연영화 "아리랑" 외 18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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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관동정 70-22 |
|---|---|
|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 70-2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37년 8월 10일자 기사에 사망 당시의 집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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