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영상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에 1970년대 신축한 것이다. |
| 정의 | 일본이 주는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고 투옥 중 단식자결한 김영상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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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 |
| 관련 내용 |
김영상(金永相, 1836∼1911)은 전라도 고부에서 출생하여 태인에서 거주하였다. 본관은 강진이며, 자는 승화(昇和),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 운명을 개탄하여 두문불출하였다. 1906년 최익현이 태인으로 와 임병찬과 함께 창의를 도모할 때 그는 무성서원의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최익현과 여러 차례 만나 의논하고, 창의를 발의하면 자신은 관내의 유생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겠노라 약속하였다.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이 창의를 결의하자 그는 총참모장이 되어 수많은 유생을 의진에 끌어들였다. 최익현 등이 순창에서 피체될 때는 사정으로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뒤 양반과 귀족을 회유하기 위해 이른바 은사금을 나눠주었다. 김영상은 일본이 주는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다가 체포되어 군산으로 압송되었다. 압송 도중 만경강(萬頃江)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산형무소에서 9일간 단식하다가 1911년 5월 9일 옥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영상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35년 8월 29일, 「순절 선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 1976, 248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442쪽.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건립추진위원회,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신아출판사, 1994, 150∼15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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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 |
|---|---|
| 주소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26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2길 8-11 |
| 위치 고증 | 「김영상 공적조서」 및 『독립운동사』7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상의 고손자 김호갑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였다. |














김영상이 만경강에 투신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태산선비문화사료관 소장)
김영상 집터 입구
김영상을 모신 필양사
김영상 집터